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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섬에서 일구어 낸 미적 이미지 -여행과 만남-

 - 주성열(예술철학, 단국대 겸임교수)

 ‘사물을 있는 그대로 혹은 보이는 대로 인식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일까. 시대정신은, 현실성은 관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표상되지 않는 것일까.’

 소위 사실성에 근거를 두고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소모적인 염려의 핵심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하여 자신의 의도에 상응하는 이미지를 끌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방식과 결과물이 ‘아방가르드(avant-garde)’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데 있다.

 이성적 사고 없이 물리적 감각만으로 이미지의 대부분이 판별되는 구상화의 경우는 귀납적 해석이 가능한 추상에 비하여 작업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보인다. 누구나 알고 있는 보편적 실재에서 개별 심상과 지각을 취득하여 설득력 있게 표현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여과과정이 필요한 이유에서이다. 공감대가 많다는 것이 창작의 호의적인 환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들이 구상계열을 선택하는 것은 그러므로 예술적 삶에 투신하고자 하는 재능과 신념이 확고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연은 주어진 것이어서 그것에 인위적인 조건을 가미하여 살아가는 형태가 자칫 원래의 삶의 형태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첨단의 환경조차 실제로는 자연의 이치와 심상에 원리를 기대고 있다고 보면 인간에게서 예술에서 자연을 분리하거나 그것을 소홀히 취급하는 일은 부당하기 그지없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경이감을 찾아내는 일, 방관해오던 것으로부터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하는 일 등은 새삼 언급하지 않아도 구상회화의 역할임이 분명하며 그것에 투신한 작가들이 자연과 삶에 대하여 극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한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신영진은 구상작가로는 명분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화단의 현실에서 순수에 토대를 두고 정직하게 시각을 견지하는, 패기 넘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어쩌면 자신의 그림에서 어떠한 제도권적 의의도 건져 올리지 못하리라는 불안을 떨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목소리를 낮추고 내면의 울림을 탐색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음이다. 주어진 결론 위에 거창하고 위압적인 주장과 체제를 정비해 가는 방식보다는 권위는 약하지만 고상하고 섬세한 질문을 구상미술이라는 인식의 틀로 제기하는 것을 우선한다. 자연을 상대로 한 감응이 그림의 고유한 미적 형식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인간인 자신과의 교감을 위해 자연이 답하는 것에 귀 기울인다. 추상적 개념과 논리보다는 직관에 다소 비중을 두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당연하다.

 

 지구가 자전(自轉)하면서 쿵쾅대는 소리나 풀잎의 미세한 떨림 같은 것들은 인간의 몸으로는 감지되지 않지만 그것이 우주 순환의 원리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이러한 것을 체득할 수 있는 관조의 정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작가는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강한 생명력으로 꽃을 피우는 영산홍, 땅을 일구는 자의 정직한 땀방울, 제 아비의 시린 발등을 덮은 낙엽의 희생 등은 거창한 논리나 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에는 완성이 없다는 작가의 생각은 그러므로 매우 소중하다. 꿈틀거리는 땅, 출렁거리는 물줄기는 항구적인 생성과 변화의 진리이다. 인간은 자연의 열려있는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닫힌 체계라 판단함으로써 그들을 실험하고 조작하지만 역설적으로, 사회라는 거대한 실험실에 갇힌 인간은 그 과정에서 오히려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어가고 있다. 자연의 본질이 인고(忍苦)이듯 그래서 감성과 본능을 중시하는 화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의 이유는 감춰진 심상의 아름다움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래서 서정성 가득한 신영진 그림의 부드러운 질감과 주제들은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어떤 놀라운 관념으로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라는 본분을 충실히 실현하고 있다. 도구나 장치가 되어버린 인간의 삶을 영혼이라는 질료로 포근히 감싸는 듯한 그의 작품들은 널리 유포된 여타의 감상들과는 의미를 달리한다.

 

 인간의 근본이 아무리 어둡고 단단하게 굳어져있다 해도 풀 한 포기나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행위만으로 마음의 온기와 삶의 향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수평에 수직을 세우는 것이다.

 “모방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예술분야, 즉 회화만큼 예술가의 기능이 잘 나타나는 분야는 없다. 위대한 화가들이란, 이미 모든 사람들의 보는 방식이 된, 혹은 미구에 그렇게 될, 사물에 대한 어떤 보는 방식의 시발점이 있는 사람들이다.” 베르그송

 예술적 재현은 자연을 바탕으로 했을 때만 가능하다. 구상회화는 수평에 수직을 세우는 원리대로 자연이라는 수평 위에 세워지는 미메시스를 근거로 삼는 예술이다. 예술은 시지각을 통해 재현되며 사물을 본질적이며 특정한 대상으로 감지하여 그것의 의미 있는 측면을 포착해낸다. 대상의 은폐된 참모습과 그것을 투영시킨 이념 혹은 감정의 표상이며 공간과 공간 사이의 대립을 풀고 공허한 공간으로부터 은유를 만들어 나가는 충동의 결과이다. 그것이 자아의 내부로부터 나오며 자아의 심화된 존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화가가 지각 대상을 보호하려고 본능적인 제스처를 취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일차적 근거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구상회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겠다.

 신영진의 작품은 팽창된 예술적 감성의 끈들로 조화롭게 짜여진 직물과 같다. 자연의 감춰진 고리를 영민한 솜씨로 끄집어내어 마티에르에 관한 거부감을 없애고 부드럽게 펼쳐 놓았다. 때로는 힘이 들어가야 할 부분까지도 매우 유연하여 그가 이미지에 굴복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긍정하고 은밀한 진리를 사유화하지만 결국 자연에로 복귀하는 것으로 완성을 결정하려는 작가의 원칙이면서 개별적인 장치로 보인다.

 예술가는 작품이 그가 추구하는 조화에 다다를 때까지 자연이 제공하는 것을 채집하고 선발하며 고르게 배열하고 바꾼다. 자연 속에는 예술가가 찾고 있는 이미 만들어진 형태의 조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나 어떤 검증된 것도 없으므로 작가는 탐구를 멈출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셈이다.

예술은 한번도 완성되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결국 어떤 예술 양식도 절대적 가치나 진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반복적으로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운명인 것이다.

 베이컨은 “마음의 욕구에 따라 어떤 사물이 나타난다.”고 했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한 인간의 일부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에 호소하는 것이어서 개별적 욕구에 의해 선발된 이미지의 객관성 여부에 따라 화가의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작품을 통하여 관찰과 경험을 보여줌으로써 화가 자신이 그림이 되고 관객은 그림에서 그를 되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림은 화가 자신의 순수한 시선과 세계관, 능력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화하며 끊임없이 자기완성을 추구하려는 의지 자체이므로 붓놀림 하나마저도 철저한 의지의 반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정한 형태로 존재해주지 않는 불량한 모델인 자연에 대한 화가의 감응은 그것이 지극히 개별적인 영역이라 할지라도 자신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다. 메를로-퐁티의 말처럼 ‘지각은 그냥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떨림과 받아들이는 몸의 어떤 교류가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가의 몸은 사물의 지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능동적으로 수용된 떨림을 분석하고 재현하는 도구이다. 그래서 화가는 자연의 현상이 자신의 내면에 반영되는 모습을 그려야할 의무가 있다.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은 자연이 그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으므로 그 속에 안주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과의 관계를 밝히는 일을 예술의 역할로 간주한다. 그것은 자연의 물리적 생물학적 측면을 인식하기보다는 인간과 교감된 부분을 새롭게 구성하는데 목적이 있다. 베르그송은 말한다. “예술은 자연에서 그리고 우리의 정신에서, 우리의 바깥에서 그리고 우리의 안에서, 우리의 감각과 인식에 확연히 띄지 않던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목표로 삼는 것일까?”

 대상을 소박하게 묘사하는 것만이 구상회화의 실체는 아니다. 묘사는 다양한 작용관계에서 예술가의 활동에 상응하는 합법적 생산과정의 결과이며 일정한 관점에서 구성되는 독립된 실재(實在)이다. 자기 것으로 무장시킨 이념의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털어내고 관조함으로써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인생의 순리와 직관을 얻어내는 방법이다. 세상에 마음을 내놓고 모든 존재물과 교섭을 이루어가는 테크닉이기도 하다. 육화된 내면의 성질과 형상으로 고양된 이미지의 결속은 작가의 자연에 대한 단순하고 정직한 파악과 체험이 우선된 결과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2. 섬이 물 울타리를 두르고 있다.

 “모사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도 아니고 있는 모든 방식대로의 대상도 아니며 무심한 눈에 비치는 방식대로의 대상도 아닌 것이다. 나아가 대상이 있는 여러 방식들 중 하나, 그것의 어떤 측면을 모사한다는 바로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넬슨 굳맨(Nelson Goodman)

 함민복 시인처럼 생각하자면 물이 섬을 만드는 것이지만 섬이 물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일반인에 비하여 특정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을 것이며 그것에 의해 창작의 성격이 규정된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문제에 다다를 때 물에 의해 섬으로 고립될 것인지 물이 울타리를 치고 있다는 신념으로 당당하게 고독을 즐겨야 하는지는 개별적 판단과 선택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예술가에게 무인도적 삶을 개척해 나가는 자세와 신념은 필수요건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신영진은 창의적 생산을 위한 신념과 기량을 충분히 갖춘 작가이다. 여행과 작업은 상조한다는 믿음으로 자연 탐색을 위한 수많은 여행을 감행하여 예술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을 집적하였다. 그의 정확하고도 포괄적인 예술가적 삶에 대한 인식은 여러 유형의 작가노트에서 확인된다. 현실과 자신에 충실한 까닭에 삶의 방식은 매우 능동적이며, 초상화나 인물화의 생동감과 섬세하고 미세한 뉘앙스, 풍경화의 순간성과 현상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능력, 누드에서 감지되는 모성과 고고한 심상을 부각시키는 재능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다. 화가로서 유화물감을 다루는 부분은 말할 나위없는 사항이지만 그의 경우는 인물, 누드, 풍경화에서 경탄할만한 ‘솜씨’로 드러난다.

 신영진이 초상화를 그리는 관점은 인물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는가 하는 가능성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 초상이 매번 새로운 의미와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함을 전제로 한다. 훌륭한 초상화란 대상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존재의 내면과 일치하여야 하며 모델의 타고난 내면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스크 뒤에 숨어 있는 것을 표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 얼굴의 온갖 가시적인 요소들조차 드러나게 하는 것, 사진이나 평이한 감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원천을 부상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인물보다는 배경에 많은 관심과 시간을 할애하여 인물과 배경을 사실성과 추상성이라는 상이한 두 양식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이 실재의 소박한 모사가 아니라 다양한 작용관계에서 예술가의 묘사활동에 상응하는 합법적 생산과정의 결과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추상적 배경은 개별적 판단이지만 인물의 재현은 모델과의 이해관계를 따르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언어를 빌리자면 전자는 직관이며 후자는 분석에 속하는 것으로 심신과 자연의 합일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은 풍경화에서도 적용되는데 2년 전 영산홍을 그린 작품의 배경에서도 그 의도가 두드러진다.

 

 3. 보편적인 것에도 정신적 깊이는 있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본 것에 대한 그의 이론이다.” 챨스 퍼어스(Charles Peirce)

 

 미적으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편견을 제거한 눈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인식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대나 예상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틀에 사로잡혀 그들 앞에 명백히 무엇이 있는지를 볼 수 없다. 서리처럼 무겁고 인생처럼 심오한, 관습이 그들의 힘겨운 부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상상력이 모체가 된 훌륭한 작품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술적인 가치가 없는 작품은 없다. 미적 대상은 어떤 식으로든 매혹적인 어떤 성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기능이 전적으로 창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드러냄, 다시 말해 우리에게 생경한 감정을 제공함은 물론이거니와 잠재되어 있던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강하게 작용한다. 예술은 각자의 무의식과 그 안에 잠들어 있는 감정을 인식하는 방법이며 타인과 세계를 공유하는 방법이다.

 온화하고 정적인 신영진의 그림은 인간의 미묘한 감응을 정교하게 다듬는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잘 풀어져 있거나 자연 속의 사물이 서로 화합하는 등 거대 담론이나 이성과 논리로는 파악할 수없는 심상을 풍부하게 획득하고 있다. 애써 유지하려는 낮은 숨결과 가벼운 떨림은 어느 사이 배경에 어우러져 대상끼리 연결고리를 생성함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예술은 실재현상에 대한 목적론적 적응이다. 예술의 완성은 진실한 아름다움(truthful beauty)이라는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갖는다고 화이트헤드는 주장한다. 또한 그는 아름다움이 없는 경우에 진리는 사소한 것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진리가 중요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 때문이라 단정하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경험의 계기 속에서 여러 요인들이 상호 적응하는 상태를 말한다. 적확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신영진의 구상작업이 회화의 다양한 방식 중 어떤 부분에 대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더욱 분명한 것은 심미적 이성과 심오한 개인적인 철학도 소홀히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4. 이미지는 모방이건 상징이건 창조물이다.

 “가시적 세계 전체란 상상력에 의해 상대적 가치와 지위를 부여받게 될 이미지와 기호의 보관소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상상력에 의해 소화되고 변형될 반죽과 같은 것이다. 요컨대 이미지란 자연이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근원적 의미를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재현해 내는 것도 아니라, 그 대상을 상상력을 통하여 숨어 있는 의미, 새로운 의미의 운반자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보들레르

 사물의 재현에는 사물이 지닌 본질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도 포함된다. 작가 또한 사물의 신분을 결정짓고 판단하려는 의도보다는 해체를 통해 조합을 실행하려는 목적으로 재현에 임한다. 그 과정에서 추상과 구상의 어정쩡한 경계가 생겨날 수 있으며 추상의 단면에서 구상적 사유의 혼재를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것은 구상적인 의식과 추상충동이 한순간 결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예술가는 일상적 감각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자기시대의 인간으로서 자신에 대하여 발언한다. 때문에 어떤 종류의 예술작품이든 보편성에 대한 희망과 개인적인 감수성을 담는 것에 방관하지 않으며 시대적 가치에 동조하는 요소를 지니게 마련이다. 구상회화는 전위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다소 구태의연하게 보일지도 모르나 당연히 예술의 중요한 한 형식이며 다른 장르들이 그렇듯이 심미적 이성과 개별적인 철학을 배제하고는 의미가 없다.

 모든 예술에는 관습적으로 보편적인 측면이 존재하고 이와 같은 보편성은 예술가와 감상자를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감상자는 새로운 것에서 예술의 가치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익숙한 형식에서도 만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익숙한 것에서 약간의 생경한 느낌을 감지하는 것에 더욱 예술적 체험을 실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사유는 그 이전의 사유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새로움과 익숙함은 상호교류를 근본으로 하면서 서로를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된다. 형식과 가치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지만 근본적인 내용은 동일하며 가치판단에 있어 그 어떤 것도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동일한 장소와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분명 영역의 구분은 존재하며 또 그 질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단 하나의 규범적인 형식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오만함의 결과는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없다. 예술에서 특정한 내용을 폄하하거나 존중하는 경향은 역사적 현상이지 절대적 진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아름답고 진실한 것과 효용가치가 있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내용들은 제도 비평이 만들어낸 척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새로움과 익숙함은 논쟁의 상대가 아니며, 더구나 대립은 아무런 생산적인 결과를 유발하지 못한다. 예술을 예술이라 명명하고 구분하는 일은 권력을 지닌 자들의 유산이다. 쉴러는 말한다. “예술이 지적인 목적이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수용자를 특정한 성향으로 이끌도록 수단화된다면 그 예술은 인간의 소외를 심화시키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이 아니다.”

 5. 억압 받아온 이미지에 마음을 기댄다.

 “예술은 직접적으로 가시적 대상을 모방하지 않는다. 예술은 자연적 대상들이 나오게 된 이치로까지 올라간 다. 또한 예술은 그 자연적 사물에게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덧붙이기로 하지. 예술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그 사물들의 결점을 보충해주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변형과 보완에 의한 상징적 상상력의 창조물이 된다.” 플로티누스“

 현란한 결과를 기대하기 이전에 순수한 방법으로 목적에 다다르려는 노력에서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자면 제도적 여건에서 벗어나 작가 개인의 감정에 몰입하는 비중이 다소 높아져야 할 것이다. 바슐라르는 이미지는 인간 내면의 합리성을 지향하는 의식과 다른 의식이 활동한 결과이며 이미지 자체는 놀라운 창조성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합리적인 사유를 보완해주는 중개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힘은 인간 속에 내재한 또 다른 의식의 활동에 있다고 했다.

 분석하고 설명을 해야 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보는 순간 감흥을 받는 그림이 있다. 자연을 화폭에 담는 경우 좋은 그림은 자연에 대한 화가 자신의 인식이 내포되어 있기에 실제보다 더 많은 감동을 준다. 그림을 통하여 자연은 새롭게 창조된 세계가 된다. 우리가 만드는 이미지가 현존하거나 부재하는 대상의 모방이 아니라고 해서 그 존재 자체를 거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주장처럼 예술의 주요 목적은 인간영혼에 관한 진리를 해명하고 그것을 진술하는 데 있다.

 버트람 제섭(Bertram Jessop)에 의하면 예술가들이 자연으로부터 모티브를 빌려오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대상이 표현적 성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목적은 느낌을 불분명한 대상 속에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질료를 선택하고 결합하여 의미를 고양시키는 것에 있다. 예술가의 시각 속에 들어온 대상은 반쯤은 지각되고 반쯤은 창조된 것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도 ‘화가의 시각자체는 이미 하나의 회화이다’라고 주장한다. 본능은 자연환경과 하나가 되지만 지능은 자연환경의 지배자요 주인으로 군림한다.

 - 나가면서

 “기술로부터 탄생된 사치를 속죄해야 하고, 포기의 정신 속에서 검약과 가난의 정화된 길을 자신에게 부과해야 한다. 개념의 자동성과 문명의 우글거리는 장식들은 불필요하게 중언 반복된 낭비의 두 가지 모습이다.” 쟝켈레비취(Vladimir Jankelevitch)

 코헤렛(Kohelet)은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창작 활동의 결과물은 ‘해석’에서 가장 큰 문제가 야기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해석이 없다면 현대예술에 남아 있는 것은 사물 자체뿐일 것이다. 현대예술에 대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지배력을 이용하여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일상적인 사물이 해석이라는 제도적 권력에 힘입어 예술의 전당에 오르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을 미적 경험으로 판단했던 듀이(John Dewey)는 예술에 대한 이러한 박물관적 개념의 숨 막히는 지배를 파괴하려 했다. 그림의 정화는 제도권의 전지전능함과 핏기 없는 형식적의 말의 논쟁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가능해진다.

 미적관심보다 더 평범한 것은 없다. 예술과 미적경험이 삶과 분리되어 마치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예술의 습관은 생생한 가치를 즐기는 습관”이라 말한다.

영혼의 숭고함을 의식하는 사람도 줄어들고 영혼이 자유롭게 숨쉴 공간도 점점 줄어든다. 오성과 이성만을 따르는 사람들은 오래된 영혼은 독소를 품고 있고 게다가 실효성마저 상실했다고 믿고 있다. 신체를 버린 정신은 장엄하기는 하나 평온하지는 못하다는 말이 있다. 미를 제거한 현대미술은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있지만 그래서 언제나 불안하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지 않다. 역사적으로 구상미술의 심미적 관점이 지나간 형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진리의 절대성을 감안하면 구상이건 비구상이건 같은 입장에서 고뇌의 원추를 굴리고 있는 셈이 된다. 감성과 이성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인간됨의 조건이다. 구상과 비구상의 대립은 창과 방패의 이야기처럼 해법이 찾아지지 않는 구조이다. 상호작용에 의해 자기합리화를 지향한다면 서로를 보충하면서 서로의 발판이 될 것이다.

 미셀 트보즈(Michel Thevoz)는 말한다. “예술가들 스스로가 제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예술의 이데올로기는 예술의 실재적 효용에 대한 거부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이 경우에 비난해야 할 것은 예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바로 그것이다.”

 인간 의식의 다양성을 하나로 묶거나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각각의 예술작품은 작가의 심오한 노력의 산물이므로 다양성은 예술의 근본적인 시스템이다. 작가는 매순간의 감각적 체험에 주체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우주를 반영하는 전체성과 독창적인 느낌의 깊이를 이해한다. 따라서 재현은 모방도 적응도 아닌 변화를 추구해 나가는 작가의 실천이다. 현상 뒤에 존재하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본체(이데아)를 화가는 단지 의식을 가지고 표상할 뿐이다.

 새로운 시각과 신념으로 구상미술 위해 정진하는 화가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작가는 직관으로 보여 지는 대상을 통해 창의적인 작업방법으로 개인이 추구하는 진리나 진실, 그리고 진선미를 그려내야 한다. (...) 자신만의 독특한 형식미 탐구나 테크닉을 익히고 있다 할지라도 그 기술 속에 자신을 가두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그릴 것이며, 무엇을 왜 그리고 있는가라는 본연의 질문을 지속적으로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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