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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이가 끊임없이 상상하는 인도이야기, 길에 오르다!

 변상형(한남대 예술문화학과 교수)

 神이 삼억 삼천 개나 된다는 풍요로운 신화를 품고 自然과 神과 人間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나라, 인도. 누구나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가장 흔히 어느 곳에서나 접할 수 있는 것이 작고 예쁜 그림들이다. 주로 이슬람왕조를 세웠던 무굴왕조의 통치기록을 표현했었던 세밀화들이다. ‘minnaare’가 어원으로, ‘붉은 색으로 그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는 그림의 크기가 작다는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도의 세밀화는 대부분 왕의 화려한 행렬이나 힌두 신들의 다양한 이미지 그리고 아름다운 왕비와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들을 표현하는 시각적 이미지들이 대부분이다. 신영진의「인도이야기」展의 작품들은 바로 이 세밀화를 차용하고 있다. 작가는 포토샵 활용을 통해서라도 더욱 정교하게 의도하고자 했던 바를 담아내기 위해 인도의 세밀화에 다양한 연출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뜻 보면 그의 작품들은 세밀화와 사진이라는 결합으로 인해 마치 사실주의적 관점과 기법에 머물고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이 들 수 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외피적으로 보이는 방법론적 현상일 뿐 그의 그림은 다양한 시공간의 접합이 주는 판타지로 인해 다양한 상상력이 춤을 추게 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뭔가 하는 것이 좋은, 시간이 허락되는 데로 마음이 가는 데로 자유로운 그저 소일거리가 되어버린 것 같다고 고백하는 그에게 있어 그림의 주제는 늘 일상 그 자체이다. 그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소소한 일상의 환경들을 그림으로 그린다고 하는 그의 작업은 그 동안 탄탄한 사실주의적 조형성을 기반으로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인물 중심의 구상화에서 사실주의적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최근에 와서야 처음으로 풍경화 전시를 한 바 있지만 그에게 있어 인물화와 풍경화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인물화와 풍경화는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풍경화와 풍경은 다르다. 풍경이란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의미 매김이고 창조적인 생산이다. 틀 없는 풍경은 무한히 생성되며 또 밖으로 삶을 확장해내는 탄생의 계기를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이다. 그렇다면 그의 풍경화는 사실상 마음의 풍경에 다름 아니다. 그가 인물이든 풍경이든 단지 사실주의적 조형성만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단한 사실주의적 외피 너머에 잠재해있는 심경(深境)에는 끊임없이 이야기가 부드럽게 흘러 넘친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이 제각기 그려내는 만큼 화면에는 절대적으로 외화 되어 드러나지 않는다. 자칫 형식적일 수도 있는 작가의 그림 소재들은 모티브와 상징이 되어 도상처럼 자리 잡아 보인다. 하지만 이 사실화의 도상이 주고자 하는 진정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의 작품은 감상자로 하여금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하는 마력이 있다. 이 마법 같은 풍경과 마주하게 하고 즐겁게 샘솟는 이야기들이 상상의 날개를 달고 화면너머에서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손끝에 인도의 세밀화가 놓여 있다. 그 세밀화와 마주한 인도의 풍경을 신영진 작가는「인도이야기」展 작품들에서 풀어낸다.

 

 그의 작품들은 인도의 세밀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으나 이미 완결된 듯이 보이는 장면들 마다 새롭게 이질적인 요소를 개입시킴으로써 기존의 세밀화가 가지고 있었던 서사적 이야기의 구조를 벗어나는 동시에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생성하고 있다. 옛 인도의 신화와 같은 서사구조에 개입해 들어오는 현재라는 시간성이 충돌함으로써 그의 화면은 복층적 플롯으로 한층 견고해지고 한층 더 감상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새로운 시공간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과 문화의 개입으로 더 이상 크리슈나와 라다의 고전적인 사랑의 구조는 지속될 수 없다. 그렇다고 문화적 충돌을 일부러 느끼게끔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의 세계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옛 이야기의 기본적인 구도를 통한 정서적 감흥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시간적 공간적 차이를 현격하게 드러내 보이는 그의 작품은 옛 인도의 신화와 왕과 왕비의 사랑이야기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듯 새로운 상상력을 개입시키고 고착화된 세계에 틈새를 만든다. 시공간의 차원이 다른 현시대 누드여인의 등장은 고정된 신화와 세계의 질서를 뒤흔들어버림으로써 이질적 요소들의 접합으로 인한 차이를 생성한다. 이제 옛 인도의 신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현재의 인도로 미끄러지고 새로운 이야기들은 화면 안팎에서 쉴 새 없이 만들어진다. 이 차이를 발생시키는 옛 서사구조의 파괴와 해체는 그의 이번 전시를 가능케 하는 방법론적 도구이다. 기존의 소재와 도구로 옛 서사구조를 뜯어버리는 아이러니한 해체작업은 동시에 변화와 차이를 낳았으며 이제 그 성과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의 몫이 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 만큼 수없이 만들어지는 이야기 결들의 방향은 그래서 미래로 자연스럽게 흐른다.

 

 신영진의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이렇듯 또 다른 이야기를 듣고 상상하며 보게 된다. 더 이상 과거의 고전적 세밀화로 볼 수 없는 그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가 이질적으로 접합되면서도 동시대적으로 어울리고 있는가 하면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열려있다. 그의 작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들을 마주하며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상들은 훗날 일정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기억을 통해 새롭게 변질되어 갈 것이다. 인도의 세밀화 한 장면에 대한 인상은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결합일 뿐 실제 기억하는 것들은 올바른 기억도 사실의 재생도 될 수 없다. 기억이란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성하는 또 다른 이야기의 차이까지도 그의 그림은 포함하고 있으므로 미래로 열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끊임없는 존재론적 차이를 발생하는 그의 작품에서는 서사와 형식도 주객관도 해방되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의 그림은 일상의 자유로운 붓질이 날마다 낡은 틀을 지우는 행위가 되었다. 거대하고 견고한 형식이 가진 위악을 털어버리는 과정의 작업이 곧 그의 그림 그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일찍이 2002년에 구상미술의 새로운 시각에 대해 말할 때, 사실주의는 대상의 세밀한 묘사가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포착하는데 있다고 했다. 진실이란 내적 감흥과 실재적 삶의 양상이 포함되는 실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에게 사실주의라는 외투는 거추장스러운 규정일 뿐이다. 이제 형식적 장르나 경계의 틀을 스스로 벗어 던지고 있는 작가 신영진은 현 시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질료를 그의 작업에 수렴하는 작업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상상하는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의 이번 ‘인도이야기’는 인도를 통해 우리시대를 그리고 그의 일상이 그려내는 내밀한 기억과 감정까지 ‘이야기’하는 일기 같은 여행기가 될 것이다. 인도의 여행길에서 어느 순간 만난 그를 붙잡아둘 수는 없으리라. 그의 여행은 끊임없는 다른 시공간으로의 탈주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탈주의 흐름 가운데에서 그의 작품은 하나의 방점을 찍고 다른 길로 나설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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