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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와 하늘의 서시, 회화의 근성을 보여주는 예술언어의 열매

 - 신영진의 감나무와 블루

 

신영진 작가의 감나무 그림 주제는 감나무 그 자체이다.

하늘을 향해 팔을 올리듯 가지를 뻗은 감나무는 나무의 일부분만을 마치 클로즈업 촬영을 한 것 같은 이미지이다. 감나무의 배경 하늘은 유난히 푸르게 느껴진다. 그런데 하늘은 감나무의 단순한 배경이라고 보기 어렵다. 잔가지들에 조롱조롱 매달린 주홍빛 감들이 푸르디푸른 하늘 덕분에 더욱 도드라져서, 결과적으로 감나무의 존재성을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늘은 감나무의 현존을 말해주는 대자연으로서 감나무와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 역할을 한다.

 

 신영진의 감나무는 하늘에 기대어 존재한다. 감나무 사이사이 내비치는 하늘색은 유난히 푸르러서 눈을 시리게 할 정도인데, 그도 그럴 것이 작가의 오랜 연구 끝에 벼려 낸 색이 블루이기 때문이다. 전에 작가가 주로 사용했던 것은 붉은 빛이 도는 코발트블루와 청금석을 갈아 만들어 보석처럼 화려한 울트라마린블루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이 한국의 가을 하늘이었던가 보다. 한때 작가는 울릉도와 독도를 여행하면서 감나무에 걸린 시루리안블루빛 하늘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시루리안블루는 파란 옥과 같은 색으로, 미처 여름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가을 하늘의 낯빛, 즉 청록색의 질투를 담는다. 몬드리안이 어느 날 문득 바다와 하늘이 서로가 서로를 닮고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느꼈듯이, 더 이상 바다의 푸름과 대기 중의 푸름을 구별하지 않는 다종다양한 블루의 향연이 이미 신영진의 감나무 위로 펼쳐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 리얼리즘의 시학

 

 작가는 왜 감나무에 주목한 것일까? 가을이면 흔하디흔한 과수이자 관상수로 한국의 어느 곳에나 있는 감나무를 그가 애착을 갖고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즈음부터이다. 한국인의 정서 속에서 감나무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혹은 기다림과 같은 애틋한 추억의 빗장을 여는 열쇠가 된다. 이러한 감성을 자극하고 유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 특유의 리얼리즘적 방법론이다. 신영진의 리얼리즘은 선택한 대상의 복제 이미지를 추구하는 식의 기계적 재현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신영진이 그리는 감나무, 감, 하늘, 까치, 나뭇잎 등 어느 것 하나, 사진과 꼭 같음을 추구하는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적 방법과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신영진의 감나무 작업은 엄밀히 말하자면 구상미술의 아카데미즘 전통 위에 있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뎃상과 구도의 정교함은 사실주의의 문법을 구축하고 아카데미즘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아카데미즘이 만들어내는 기계적 모방이나 구태의연한 기교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난에 직면한다. 신영진 역시 수년간 그러한 사실주의의 정통 계보에서 벗어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새로운 리얼리즘적 시도를 하고자 했다. 19세기 러시아의 대표화가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는 그에게 그러한 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 모범이다. 특히 크람스코이가 그린 <사막의 예수>는 신영진의 리얼리즘 미학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초췌하고 가난한 예수, 허름한 옷을 입고 맨발로 앉아 양손을 모아 그러쥐고 기도를 하는지 혹은 묵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깊은 고뇌의 표정은 크람스코이가 해석한 인간이 된 신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것은 재현된 것이지만 해석된 재현이며, 상상된 것이지만 정교한 해부학에 기초한 사실성의 이미지이다.

 

 - 감나무 그림은 해석된 재현에 가깝다.

 감나무의 아름다움 역시 사실적인 묘사 때문이라기보다 작가의 사물을 보는 시각 즉 리얼리즘적 시학으로부터 온다. 햇빛에 몸을 맡겨 주홍빛으로 익어가는 열매의 몸통들, 나뭇가지 한 귀퉁이에 둥지를 틀 까치에게 마침내 기꺼이 몸을 내어줄 것 같은 감들, 그 감들에게 적당히 비와 햇빛을 가려주는 넓은 감잎, 그 잎들이 비틀려 있거나 얼룩 같은 반점이 있는 것을 보면 감나무에 스쳐간 세월이 엿보인다. 작가는 간혹 물감에 흙을 섞어 칠하는데, 그 때문에 하늘이지만 흙냄새가 느껴진다. 보면 볼수록, 감은 이제 먹고 버리는 열매가 아닌, 눈부신 자연의 색을 지닌 존재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씨앗으로 꽃으로 열매로 생장하는 존재로, 추억 속의 사랑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과수로 재탄생한다. 정녕 감나무에 깃든 이 시적 언어들은 신영진이 쌓아올린 회화의 근성을 보여주는 예술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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