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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풍경으로 이해되는 누드

 - 박정수 미술평론가

 신영진이 추구하는 누드는 여체의 신비가 아니라 우리시대의 풍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누드는 인물의 신체를 통해 자신의 감정(정신)을 드러낸다는 의미의 표현적 측면이 강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감각의 명제의 공론화를 위해 다양한 인물의 표정과 포즈와 관련시켜 현대 사회를 분석한다. 옷 벗은 사람의 원초적 입장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화론중심의 정신성을 중심으로 동양 정신의 근간이 되는 자연의 원리와 이치에 관련시켜 인체를 그려낸다. 보여지는 여인의 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소산을 통해 미적 판단을 하는 정신적 분위기를 조장한다. 그가 가진 누드작품의 표현 근원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정신적 탐구라 하겠다.

 

 인물화와 분리되기도 하는 누드는 화면에서 오는 금기적 요소(모든 신체를 드러내는)로 인해 보통의 일상에서 다소 멀어져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누드(nude)'와 '나체, 알몸裸體 naked'는 구분되어야 한다. 나체는 알몸뚱이가 된다는 것, 그런 상태에서 느끼는 약간의 당혹감이 있으나, 누드는 균형 잡히고 건강하며 자신만만한 육체, 즉 재구성된 육체를 의미한다.

 현대 회화에 있어 누드는 에로틱 아트 (Erotic Art)와 포르노그라피 (Pornography)에서 자주 애용되는데, 에로틱 아트는 인간의 성행위와 관련된 이미지로 연결시켜 작품 을 관조하거나 또는 이미지와는 별개의 예술적 감흥을 제공하는 기법을 활용한다. 이러한 시도는 개인 혹은 사회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 그리스어pornographos로 '창부(porn)에 관하여 씌어진 것(graphos)'을 뜻하면서 성애를 다루는 하나의 예술을 의미한다. '포르노'는 '포르노그라피'의 약자이다. 포르노그라피의 외설성은 포르노가 의도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요소이다. 과거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대 신화를 바탕으로 고전적 주제가 부활되어 비너스, 제우스와 인간 여자의 연애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의 누드는 지상의 삶과 고상함의 쾌락을 위한 이상적 도구가 되었다. 인간이 신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누드를 통해 신에로 향하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르네상스 누드의 관능미는 춘화나 현대의 리얼리즘 미술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것이다. 인상주의에 이르면 누드는 전통적인 주제가 지닌 신화적 모티브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주제가 아닌 실재의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전 시대의 요정이나 나신에서 느껴지는 눈부신 아름다움, 혹은 신비함을 벗겨 진짜 엉덩이와 가슴을 보여주어 당시의 사람들에겐 포르노그라피에 불과한 그림으로 보여 지기도 하였다. 결국 현대 이전의 누드 작품의 본래적 목적은 생식과 생명의 미화를 통해 중세의 기독교적 유심론에 대해 신체를 회복시킨 인간 존엄 정신의 발로이자 인간 중심의 사회를 지향하는 시대적 소산인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누드를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어쩌면 지금 현재에도 누드에 대한 공감보다 비판이나 거부감이 우선되어 일방적으로 괄시 받을 수도 있다. 누드의 역사와 누드가 그려지는 배경을 이해한다면 시대적 논리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터이나 공감이나 이해보다는 거부가 우선되기 때문에 감상보다는 ‘구경’이 우선됨에도 딱히 반박할 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다. 누드와 관련된 논의에서 자주 지적되듯이 모든 회화에는 당파적이며 사회적 시대적 배경을 지니고 있음을 주지하여야 한다. 그러하기에 누드에 대한 현대적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화가들의 비판과 의지의 표명이며, 각성과 인식, 예술적 성취에 따르는 활동의 소산임에는 분명하다. 종족 보존의 섭리와 관련하여 관능과 쾌락의 부분을 미학적 존엄성으로 변모시켜 우리 앞에 등장할 수도 있고, 종교와 정치의 교조적 입장을 타파하면서 인간의 원초적 존재를 찾으려는 생명력의 몸짓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이든 현재에서 일어나는 감흥에 의한 예술 활동의 소산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현대의 누드는 시대의 풍경인 것이다.

 

 신영진의 누드에는 고상함과 품위가 스며있다. 현대의 감수성과 지순한 감흥이 베어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옷 벗은 여인이 아니라 움직이는 정물일 수도 있고, 자연에 포함된 잘 만들어진 건물이기도 하다. 고향마을의 풋풋한 정내가 나기도 하고, 도발적 도회의 도도한 풍경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미적 충동을 누드를 통해 사회와의 조화로운 시각으로 풀어냄으로써 자신이 포함된 세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창조원리로 채택된 누드는 곧바로 예술 의욕이며 동시에 창조적 예술가의 의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수묵과 유채로 빚은 꽃으로의 생활미학 

 캔버스를 사포질하고 젯소(캔버스 기초마감 용제)를 바르면서 그 위에 그려질 무한한 가능성을 생각해낸다. 흰색 아크릴을 바른고, 화선지를 바인더(까바롤-접착용제)로 두세겹 덧붙이면서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의 모든 상황을 고민한다. 마르기 무섭게 연필선을 긋는 것은 성격의 문제라기보다 작업에 대한 열정이 앞서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꽃과 잎사귀로 덮혀지는 오일색상들은 신기하다못해 신성의 것으로까지 확장되며, 작가의 표현대로 심상의 표현을 위한 배경이 칠해진다. 오일이 아니라 먹과 동양화 붓이다. 그어지는 획들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려지는 획들이 스스로의 살아 움직인다.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 많은 즐거움이 느껴진다. 신영진이 즐기고 있는 감흥들이 관람자에까지 전이된다.

 

 작가는 스스로 자신이 그려낸 그림들이 자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움직이는 독립된 개체이기를 원하다. “어릴적 어머님의 모습은 언제나 조용하고 여유가 있으실 때마다 그림을 그렸죠. 어머님이 그리신 하도(下圖)에다 나무와 꽃들을 칠하길 좋아했어요. 어머님은 곁눈질로 보시다가 ‘자연스럽게…’라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죠. 지금도 그때말씀이 제 작업에 들어있는 것 같아요. 어떨땐 그 말씀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으니까요.” 신영진의 그리기 작업 속에는 자연스러움이 내포되어 져있다. 그 자연스러움은 화면의 구도적 자연스러움을 포함한 정신적 즐거움의 자연스러움이다. 영산홍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 작업노트에서도 밝혔듯이 어떤 대상을 통해서 밝혀지는 자신과 타자와의 소통을 의한 교량 역할로 자리한다.

 

 신영진에 있어 영산홍은 구체적인 화면에 대해 관람자의 우위를 주장한다. ‘느낀다’는 것보다 ‘보면 즐겁다’는 것이 우선되면서, 보통 사람들의 삶과 노동과 깊이 결부된 형태의 감성을 감춘다. 감성에 대한 대별자로, 관람에 대한 겉모습의 기호로써 자리한다. 작가가 뜻하는 바대로 영산홍은 영산홍으로써 꽃이면 되는 것이고, 감성은 자유로운 영산홍 뒤에 숨어서 그 자유로움을 마음껏 즐기면 된다. 특별한 주장을 하지 않아도 그림 이면에 숨겨진 생활미학이 관람자의 정서를 자극한다. 넓은 예술의 담당자로서 위치를 점할 뿐만 아니라 시각의 기쁨까지 제공하니 무척 흥미로운 소재라 하겠다. ‘생활의 저변에 깔린 감성에서 고요한 생활 속으로’의 침투가 일어나고 있다. 꽃이라는 존재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감성과 생활의 미학을 행한다는 작품 제작방법은 자신의 자의적인 혹은 감각적인 평가의 개입의 여지를 폭넓게 하면서 ‘삶’이라는 생활의 주체에 입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술이 극히 일부 특정인들의 호사가적 흥미의 대상으로만 보이던 것에서 벗어나, 생활과 밀접함에서 오는 ‘생활속에서의 예술’로 추구되는 생활의 현장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른다.

 

 질투심 많은 어떤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 모든 것을 참고 포용하는 꽃이며, 치열한 생활의 현장에서 숨가쁘게 살다가 어떤 계기를 통한 편안함을 무한히 느끼게 하는 붓 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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