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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적 리얼리티를 형이상적 시공으로 풀어 낸 작업들
                                                                         

  -황효순 (미술평론가) 

 

  ‘내가 당신 작품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증오의 감정으로는 글을 쓰지 않습니다.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며, 비평이란 근본적으로 그런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뉴욕의비평가 로버트 로젬블럼의 말이다. 작가의 작품에 대한 애정 없이 글을 쓴다는 일은 영혼 없는 메아리에 그칠 수 있다. 그래서 작가의 애호가로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며 함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신영진은 20세기 이후, 다원화된 미술계에서도 굳세게 외길을 가고 있는 흔치 않은 리얼리즘 작가이다. 국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사라진 아카데미즘을 못내 아쉬워하며 그림에 정도를 지켜 나가고자하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감성적 리얼리즘이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함축한 용어가 아닐까한다. 화가로서 4반세기 이상의 길을 걸어 온 그의 궤적을 정리해 본다.

 

 스승과의 만남

  신영진은 서울 태생의 작가이다. 어린 시절을 도심 한가운데서 보내며 자라왔던 그는 6살 무렵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하게 된다. 어린 눈으로 바라 볼 때 무언가를 늘 만드시고, 그리시던 어머니의 곁에서 밑그림에 색칠을 하면서 그림이 무엇인지 막연히 알게 되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럴때면 어머니는 ‘자연스럽게~’라는 말을 조용히 하시곤 했는데, 다 칠한 그림을 칭찬해 주시면 기분이 좋아 그리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이후 중학교에 진학할 때 까지 큰 두각을 내지는 못하고 있었던 그에게 큰 계기가 된 것은 중2때 만난 박종 미술선생님을 통해서였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교내에 나가 사생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던 선생님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도 손수 작품을 하셨는데, 신영진은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유심히 관찰하고 그대로 따라 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일종의 어깨너머 따라 하기 학습이었지만, 눈썰미 있던 학생을 훌쩍 키웠던 학습활동이었던 셈이다. 이 시기 스승과 작품집을 통해 배운 구도와 색감의 사용으로 교외 대회에 나가면 대상을 모두 가져왔다고 한다. 이미 구도에 대한 논리를 알게 된 신영진에게 미술선생님은 대회에 참가한 다른 학생들의 구도를 잡아 주도록 부탁하셨을 만큼 작품을 대하는 수준도 성장해 있었다. 이런 일련의 기회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영진에게 데생이나 묘사력을 확충시키는 계기를 가져왔고, 작품으로 눈이 깊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초를 단단히 하는 단계에서 만난 미술선생님으로 인해 신영진의 출발은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아카데미즘에 대한 작가의 생각

 신영진은 대학시절부터 작품세계가 일관되어 있고 대학원 때부터 ‘신작전회’, ‘목우회’, ‘신미술회’ 등 미술단체활동을 하며 아카데미즘의 연구에 빠져 있었고, 구상화계열로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해오고 있다. 신영진이 대학시절부터 소속돼 있던 단체의 성격은 사라져가는 아카데미즘에 대한 아쉬움과 막연한 사명감 같은 데서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대학교단에 서 있는 지금, 어쩌면 더 강렬하게 요구되는 학습요건이라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아카데미즘은 본래 학문연구나 예술창작에서 순수하게 진리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세로 정의하고 있어 추상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상호 공존해야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이태리 피렌체에서 기원하여 유럽에서는 프랑스화단의 메인 프레임이었고, 정확한 인체비율과 뎃생, 원근법을 기조로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낸 양식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교육현장에서는 거쳐야할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이 정치와 연계되고 시대사관으로까지 비화되면서 우리나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서양화 도입기에 유학한 학생들은 일본의 관립학교 영향을 받게 되고 식민지 상황에 있던 우리나라는 주체성과 연계하여 아카데미즘을 지배층의 상징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아카데미즘은 출발부터 제국주의 문화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강해 반정서가 확산되기까지 하였다. 이후 해방과 함께 대학이나 국전을 통해 일부 일정기간유지되어오다 전쟁을 전후로한 추상화물결에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추상물결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도 혼란기였으며, 학생운동이 격화됐던 시기로 기성세대와의 대립이 불거졌고, 이런 상황은 미술계에도 예외없이 불어 닥쳐, 기성문화의 장례를 치르는 의식까지 자행되던 때였다. 그로인해 구상과 추상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구도로 과거의 것은 무조건 진부하고 퇴보적이라는 의식이 추상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진정한 아카데미즘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기성세대와 대립하던 신진세대에 의해 바꿔야 할 시대적 문화로 여겼던 것이 한국적 아카데미즘이 자리 잡을 수 없었던 큰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 추상화가들이나 모더니스트들, 아니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조차도 대부분은 탄탄한 기초위에서 시작하였고, 그 후에 지우고 깨는 작업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신영진이 가장 안타까워하고 있는 부분이다.

 

3. 신영진의 작업들

 화가 자신이 선택하는 그림의 소재는 작가가 작업과정에서 대화를 나누는 대상이기도 하다.우연히 지나치는 과정에서 선택되는 소재로 보이지만 사실은 필연성이 개입된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자신이 연출해 낸 시각화이자 자아 정체성이 반영된 담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신영진은 그 동안 누드. 인물. 풍경. 정물. 인도의 카마수트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로 작업을 해 오고 있다. 특히 여행지에서 만난 인물의 표정은 내면까지 외현화한 작품으로 평가 할 만큼 그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신영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누드화가로 가장 많이 기억할 것이다.

 

 

1) 채워지지 않는 열망 –정물화

 

 신영진은 근작 중에 톡특한 주제로 정물화 연작을 선보인바 있다. 그가 위에서 추구해 오던 작품세계와는 좀 색다른 기법의 사용과 화면의 혼용법으로 그린 이 작품들의 명제는<오전 9시><결실>이나<사랑>이 주를 이룬다. 이 그림들에 단골로 나오는 소재는 식빵과 함께 유리잔에 포도주, 장미, 오렌지, 레몬 등이다. 오전 9시라면 바쁜 사람의 아침식사로는 늦은 시간이고 오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에겐 여유로운 시간이 된다. 붉은 포도엔 적포도주를 청포도엔 백포도주를 유리잔에 담아내고 있다. 소소한 일상으로 읽혀지지만 유리잔의 강조가 삶의 허무를 뜻하던 바니타스와 연결점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정물화의 시작은 17세기 네델란드로 거슬러 올라간다.<아침식사 정물>이란 주제는 ‘얀 다비스죤 드 헤임’이 그린 것이 첫 출발이다. 접견실이나 부엌 등에 걸리곤 했던 아침식사 정물구성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의학지침을 참고했던 것이라 한다. 체액관련 의학에서는 다양한 특성의 음식조합을 추천하여 유포시켰는데 특히 백포도주나 레몬의 조합을 권장하였다. 이러던 것이 독립된 회화장르로 꽃 정물화로 발전하였고, 꽃들은 아름답지만 빠르게 지상에서 사라져 버려 인생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신영진의 그림들도 일정부분은 이런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현재 곁에 머물러 있는 대상과 시간들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리잔이나 화려한 장신구들은 깨지기 쉬운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대상들을 작가가 의식적으로 변형하는데 있어 가끔은 도자기나 질그릇을 사용하기도 한다.

 비닐 속에 든 식빵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하고 배경은 컴퓨터를 이용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컴퓨터 세대를 교육하는 현장과 사실주의 작가의 역량을 한껏 확장 시키고자하는 노력을 반영한 효과들로 보인다. 특히 대상의 사실성과는 대비적으로 바탕에 물감을 직접 짜서 자유스럽게 문질러 낸 작업들이 컴퓨터 작업 위에 나타나는 것은 회화적으로 완벽을 추구한 기존 작품과는 표현법을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회화의 덧붙임이 아니라 빼내기의 과정으로 생략해 간 배경들에서 주는 느낌은 또 다른 작가의 노력으로 다가온다.

2) 처음 본 누드수업

 미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특히 남학생들은 대학생활에서의 첫 누드모델수업에 대한 두근거림이 있다. 얼굴이 발개져서 들락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부터 눈도 못 마주치고 자신이 부끄러워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는 학생까지 다양한 양상으로 표정이 연출된다. 그럴때면 여학생들은 뒤에서 키득거리며 그 모습을 즐기기도 한다.

 신영진의 누드수업은 대학2학년 때 첫 수업이었다. 잘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맨 앞자리에 화구를 갖다놓고 두근거리며 기다리다 잠깐 실기실 밖을 나갔다 온 순간, 모델은 들어 왔고 자신의 자리는 맨 뒤로 밀려나 있어 망가진 기분으로 멀리서 모델을 보며 수업 한 기억은 그저 누드모델이 인형처럼 무감각하게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 후로 누드보다는 costume(옷을 입은 인물화)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렸다.

3) 자연을 바라보는 외경外境의 눈

 토레는 예술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술의 쇠퇴는 자연을 향한 감성을 상실한데서 연유한다고 보았다. 자연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작가야말로 완벽한 예술가라고 말하고 있다. 자연주의자들 중에는 종족과 기후, 장소가 자연과 인간을 매개로 한다는 것에 관심을 두기도 하였는데 신영진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신영진은 여행을 즐겨하는 작가이다. 국내외 여행지에서 만난 인물에도 그의 관심은 표출되고 있지만, 순수한 자연을 대상의 외경스러움으로 극대화하여 바라 본 시각화는 그가 확대 구성한 산과 하늘에서 두드러진다.

 국내 여행지를 소소히 다닌 섬마을이나 굽굽이 돌아가는 밭고랑들, 밭 한가운데를 세로로 가른 전봇대와 멀리 지평선으로 하여금 새롭게 구성된 공간은 아늑함과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의경意景이 잘 드러난 작업들은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담아낸 화면들이다. 바다나 하늘이 화면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게 배치되어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광개토태산>이나<백두산 정상>을 보면 장엄한 하늘에 휘도는 구름사이와 환영처럼 발산되는 빛 무리들, 그 아래 산줄기를 오르는 인간들의 모습은 아주 작고 미진한 형상들이다.

 이런 표현들은 동양의 자연관에서 기인한 것이면서 동시에 민족애가 함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민족에게 백두산은 년 중 눈이 쌓여 신선처럼 흰머리를 하고 있다하여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일컬어져 왔다. 이와 함께 신영진이 자연의 부분으로 애정을 담아 바라보고 화폭에 담아내고 있는 것은 우리 땅에 흔히 자생하는 소나무와 가을서정을 담은 감나무이다. 작가는 대부분 우리나라의 금강송을 소재로 하고 있고, 화면 한 가운데를 꽉 채운 채 노란 솔잎으로 그려 낸 거대한 노송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또 다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솔잎의 색채 선택은 작가의 의경으로 읽혀지는 부분이다. 소나무는 의지와 지조를 지니고 있다하여 예부터 귀하게 여겼으며 아무리 낮게 드리워도 결코 땅에 닿는 일이 없어 군자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던 교목이다.

 또한 10월이면 어김없이 시골길을 따뜻하게 물들이는 주렁주렁 주홍빛 감과 까치들도 신영진에게는 감성의 열매들이다. 감나무는 어릴적 놀던 추억속의 외갓집을 연상시키는 대상으로 작가의 마음속에 할머니의 따스함과 함께 머물고 있다. 어른들이 까치밥이라고 몇 알 남겨 놓던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던 감나무 연작을 위주로 이번 전시장은 채워질 계획이다. 이렇듯 그는 재현을 통해 심경을 표현하며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전하는 감성적 리얼리즘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4) 누드여인과 카마수트라

 몸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함께 서로가 상호 소통할 수 있는 매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고대부터 표현된 몸의 표현이 미술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반응하는가는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면서 무수한 변화를 거쳐 왔다. 그 안에 함축된 공통된 시작은 아름다운 것을 그려 간직한다는 개념으로 형상화 돼 온 몸이 현대미술에서는 거칠게 잘려지고 긁혀지기도하지만 21세기를 맞이한 이즈음도 인간의 몸에서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진행형에 있다. 그래서 젊은 여인의 벗은 몸을 대상으로하고 때론 꽃과 함께 상징화되기도 한다. 인간의 몸에서 읽혀지는 가장 감각적인 표정은 벗은 몸에서 가장 잘 읽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신영진이 과거의 기억을 뒤로 하고 다시 여인의 누드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연필인물화를 강의하면서 느낀 무료함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인의 몸을 통해 던지기 시작한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은 오래전부터 그가 사용해 온 화법이기도하다. 모델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제시하고 몸을 시각화하여 의미를 전달하는데, 꽃과 함께 등장하는 여인의 표정은 상업적으로 도구화된 자신에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고, 꽃과 동일시하는 상징성은 화려함 뒤에 감춰진 사라질 아름다움에 대한 우울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신작가의 누드화에 나타난 여인을 보면 때때로 고독미가 느껴진다. 근작에는 컴퓨터가 읽어낸 누드를 텍스트로 분리하고 카메라의 앵글에 자리 잡은 누드와 그의 손으로 그려진 누드의 작품을 병치하여 세 가지 보는 방법의 다름을 한 공간에 나타내보기도 하는 다양한 표현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영진의 누드가 시공을 초월하여 다시 나타난 곳은 고대 인도의 카마수트라의 공간이다.

 카마수트라는 고대 인도의 성애에 관한 바라문교의 고전으로 남.녀간의 성애에 대해 연구한 학문을 의미한다. 고대 인도는 귀족들에게 종교의무와 처세. 성애 이 세가지를 꼭 갖춰야 할 덕목으로 여겼다. 요즈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음란한 성이나 기교를 육성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귀족이나 신사들의 지식함양을 위해 쓰여진 책으로, 그림의 표현은 궁정의 세밀화로 화려하게 그려 내고 있다. 카마수트라의 처음 의도는 선을 행하려는 욕망, 우주창조의 원동력을 의미했으나 현재는 애욕의 신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인도에 가면 곳곳에 성애에 관한 조각과 벽화를 볼 수 있은 것은 이런 시간의 흐름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신영진의 작품에 나타난 카마수트라의 남녀 주인공 사이에 한국의 누드 여인이 시공을 초월하여 자리를 틀고 들어가 앉아있는 것을 본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고독해 보이던 여인을 위한 성애의 장을 마련한 것은 아닌가? 과거 한국에서 인도로 환생한 여인인가? 가상공간을 현실처럼 넘나드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작가가 이뤄 낸 조합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5) 순간이 살아나는 눈빛- 인물초상과 기록화

 신영진의 작품에서 백미를 꼽으라면 인물화를 꼽을 수 있겠다. 누드화에 나타나는 여인들의몸짓은 다양해도 표정에서 그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시선을 얼굴에 집중하여 바라 본 인물화에서는 대상의 분석을 통해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고 숨소리까지 묘사할 수 있을 만큼 화가의 눈이 정교하게 움직인다. 인물의 대상과 형태, 광선의 처리, 색상과 질감, 공간적 배경까지 일체감을 이루는 작품에서 결정판은 그 사람의 눈빛이다. 그래서 인물화는 그 작가의 능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서양에서 일찍부터 발달했던 인물화는 대부분 신화 속 인물을 주제로 시작하여 17세기에 와서 초상화가 유행하게 되는데 대부분이 대상의 욕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초상화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사진기의 발명과 함께 소원해졌지만 현대에도 신사실주의나 극사실주의 초상화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7세기부터 초상화가 발달했던 우리나라의 경우도 기법에서는 물론 대상의 정신까지 묘사해야한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미학적 관점이 있었고, 이것으로 대상의 재현을 넘어서는 탁월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외형으로는 피부의 결까지 묘사하는 육리문 기법으로 사대부가 갖고 있는 정신적 지조까지 초상화로 표현돼야 했는데 이런 사조들은 서양의 극사실성을 갖춘 인물화와 비견될 수 있으며 신영진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집중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여행을 즐겨했던 작가는 지나는 곳마다 풍경과 인물로 흔적을 남겨 왔지만 특히 순간의 표정을 담아낸 작품들이 돋보인다. 캄보디아 여행지에서 만난<후예>와 <후예-누나> 등 가족시리즈에서는 검은피부에 맑은 눈을 가진 아이와 누이들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배경으로 처리한 바이욘상의 얼굴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런 작품들은 태국이나 남미, 러시아, 중국 등에서 만난 인물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리얼리티를 기조로 작품을 하는 작가들에게도 인물화는 쉬운 장르가 아니다. 모두의 눈에 정확하게 판단되어지는 장르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작가가 탄탄한 기초 위에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영진의 인물화를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습을 하나쯤은 그려 받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작가는 웃으면서 IMF시절을 전시이후 들어 온 인물화 주문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누구라면 알 만한 사람들이 작품제작을 의뢰했다는 것은 그의 공인된 실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경력은 선화공주 영정의 제작이나 몇 달 전에 제작한 공군대령 ‘딘 헤스’의 기록화에서도 읽을 수 있다.

 딘 헤스대령은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전쟁고아1000여명을 위험한 상황에서 공군기로 제주도로 이동시켜 살려내고,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돌보았던 ‘공군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 그림을 위해 겨울 방학내내 자료조사하며 하루 15시간씩 투자하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헤스대령의 1주기에 맞춰 헌정된 이 120호의 대형 기록화와 초상화는, 미국의 70대 아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볼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된 작품이었다. 그는 헤스대령을 민족의 혈통을 지켜 준 사람이라고 표현할 만큼 존경심을 갖고 작업에 임했다고 하며, 이러한 결과로 딘 헤스 대령의 인자한 성품이 그대로 전달되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군에서는 그를 ‘공군역사자문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이번 작품전은 그동안 쌓여 온 그의 내공이 결집을 이루는 전시의 도록으로 그간 거쳐 온 과정의 작품을 모아 보는 종합편이다.

시간이 지나면 꽃빛도 바래 시들어 가고, 아름다웠던 사람의 모습도 세월과 함께 사라지지만, 화가가 잡아 놓은 순간만큼은 화면 위에서 정지되어 영구히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다. 화면에 걸린 대상은 사실인 듯, 사실은 아니지만 실체가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도 우리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의식의 본질이 정지되지 않는 한, 현상을 형이상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미의식은 화가의 작품 안에서 의식으로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이 덧없는 것일수록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더욱 현실처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신영진의 작업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대상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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